얕게 알아야만 쓸 수 있는 글 들이 있다. 내 친구 주호에게 말한 적 있는데, '얕게 앎의 아름다움'이라고 있다. 깊게 알면 차마 생각지도 못할 생각. 또는 생각이 나더라도 부끄러워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기발한 생각이 있다. 군대에 오면서 거창하게 니체를 읽겠다 다짐했다. 요새는 출판사 '책 세상' 에서 간행한 니체 전집의 일부 책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권, 2권 그리고 니체입문)과 이진우 교수가 쓴 '니체의 인생강의'라는 책을 읽고 있다. 지금 니체에 대한 내 지식은 초박피라고 할 수도 없을만큼 얇다. 이 얕은 지식에 기반해 드는 생각들이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라는 소설이 있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빅브라더에 의해 통제받는 사회와 그에 저항하는 무력한 개인에 대한 소설이다. 그런데 사실 빅브라더는 가상의 인물일 뿐이고,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실제로 세상을 지배하는 이들은 전문인력 집단이다. 전문인력 집단이라 함은, 과학자나 기술자를 비롯하여 변호사, 교육전문가, 광고전문가등 전문기술이나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혁명'이전의 사회에서 사회의 중산층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혁명'이후로는 지배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서게 된다. 각자 자신의 전문 기술을 활용하여, 사람들을 선동하고 감시하는 체계를 구축한다.
소설에서는 오브라이언이라는 내부당원의 입을 빌려서, 전문인력 집단의 특징을 설명하는데 이 점이 인상적이다. 그에 따르면, 새로운 시대의 지배계층은 우선 권력 자체를 탐욕한다. 이미 사회에는 부가 넘쳐나고, 그 부를 분배하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풍요롭게 살 수 있음에도, 소수가 부를 독점하는 이유는 '권력' 때문이다. 권력을 통해 무언가 가치를 이루고자 함이 아닌, 그들이 모든 부를 독점하는 바로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당의 존재 이유이다. 권력을 도구로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권력을 탐하는 것이 아니고, 권력 자체를 바라는 것. 이것이 1984년 세상을 지배하는 이들의 특징이다.
소설을 처음 읽을 때도 이 부분이 참 이상했다. 권력 자체를 바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쓰지 않는 돈은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듯이, 목적없이 왜 권력을 추구하는지 의문이었다. 한편으로는 비현실적인 사회에 어울리는 비현실적인 지배계층을 그린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도 들었다. 기존 지배세력은 사회를 통치할 때 저마다 가치를 내세웠다.
통일적인 힘을 밑받침하는 가장 핵심적인 것은 가치입니다. 많은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가치를 제시하지 못하면 어떤 권력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궁극적으로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 이진우, <니체의 인생강의>,휴머니스트, 77p
니체는 그런데 다름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행동에서 '권력에의 의지'를 찾는다. 행동은 마음의 그림자로서, 모든 행동과 감정이 '권력에의 의지'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권력에의 의지로 움직이는 동물이라니, 1984의 지배계층 설정과 오버랩됐다.
"내 말을 들어라, 더없이 지혜로운 자들이여! 내가 생명 자체의 심장부 속으로 그리고 그 심장의 뿌리에까지 기어들었는지를 진지하게 눈여겨보라!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권력에의 의지도 함께 발견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옮김, 책 세상, 189쪽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니체가 말하는 권력이란 비단 정치적 권력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니체가 말하는 권력이란 생명의 근본적인 현상이다. 권력에의 의지는 욕망, 충동, 생존, 삶에의 의지와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나의 힘을 작용하여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것을 능가하는 다른 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의지를 '권력에의 의지'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1984의 지배계층의 권력욕과 니체가 말하는 권력에의 의지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조지오웰이 니체의 영향을 받았을 거란 생각은 착각에서 비롯된 헛소리일 뿐일까?
그렇지는 않다. 조지 오웰은 니체의 영향, 정확히 말해서는 잘못 해석된 니체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독일어로는 Wille Zur Macht)는 한 때 '힘에의 의지'로 번역되어 왔다. 니체의 여동생이자 히틀러의 추종자였던 엘리자베스 니체가, 히틀러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니체의 저작과 유고를 짜깁기하고 왜곡하여 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라는 책을 1901년에 출판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대중들에게 니체의 사상이 잘못 전파되었고, 이 영향으로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일이 빈번했다.
조지 오웰이 <1984>를 집필하던 1946년부터 1948년은 제 2차 세계대전의 열기가 아직 남아있던 시기였다. 애초에 조지 오웰이 저 소설을 쓴 것도, 당시 제국주의적인 스탈린, 히틀러의 모습에 신물이 나서 쓴 거였으니... 유럽을 뒤흔든 히틀러의 지배를 정당화하던 왜곡된 니체의 사상을 익히 들었을 것이라 추측하는것이 무리는 아니다. 물론 조지오웰이 니체주의자였다거나, 니체의 사상에 대하여 쓴 글이 있다는 소식은 본 적이 없다.(조지 오웰이 니체의 주인-노예관계에 대한 글을 읽었다고는 한다. 출처 https://blogs.history.qmul.ac.uk/philosophy/tag/george-orwell/) 그래도 당시 니체가 워낙 유럽 전역에서 유명했으니 뭐 어느정도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혼자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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