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Others/적당한 생각들

글을 잘 쓴다는 것

by ju_nope 2021. 8. 19.

  숨 쉬듯 쓰는 글을 잘 쓰고 싶다. 작정하고 노력을 부어 쓰는 글은 기본적인 어휘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쓸 수 있다. 물론 글을 잘 쓰는 사람과 평소에 글을 자주 접하지 않은 사람이 쓴 글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퇴고에 많은 시간을 들이면 문장들이 못 읽어줄 수준은 탈출할 수 있다. 

  그런데 날숨을 내뱉듯 쓰는 글을 잘 쓰긴 여간 쉽지 않다. 머리에 이미 글이 완성된 채 들어있지 않은 이상, 처음 내뱉은 문장이 내 맘에 들긴 불가능에 가깝다. 처음 쓴 글을 한 번 고쳐 쓰고, 한 뼘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아, 이 표현을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이리저리 고쳐 쓰는 과정을 통해 하나의 문장이 완성된다. 그런데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해 쓴 글마저도, 언제든지 내가 휘두르는 칼날에 잘려 나갈 수 있다. 글에 포함된 하나의 문장은 스스로에 내재한 가치를 지닌다기 보다는, 주변 문장과 문장 사이, 맥락 안에서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이상하게도, 품을 들여 쓴 문장이 글의 맥락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건 아마 당연하게도, 문장에 쏟은 노력이, 의미가 얼마나 정확하게 전달되는가 보다는, 문장의 꾸밈새가 얼마냐 세련되었는가에 집중됐기 때문이다. 머릿속의 추상적인 의미를 어떻게 구조화해야 내 생각이 온전하게 독자에게 정확하게 전달될까, 하는 고민보다는, 그 의미를 어떤 문장에 담아야 세련돼 보일까, 하는 고민. 그런 고민을 하다 보면 글이 갈피를 못 잡고 흐물거리게 된다. 자주 그랬던 것 같다.

  글발은 지식발이다. 글을 잘 쓰는 건 글발이 좋은게 아니라, 추상적인 인상과 감각이 구체적인 어휘와 표현들로 잘 구조화되는 것, 다시 말해 글발은 방대한 어휘력과 빠른 두뇌 회전 속도에 비례한다고 느껴왔다. 조지 오웰이 말했다던가, 마크 트웨인이 말했다던가,  누군가가 "딱 맞는 단어와 적당히 맞는 단어는, 번갯불과 반딧불의 차이다." 라 했다 한다. 서로 다른 두 대상을 다르게 부를 줄 아는 게 어휘력이고, 그래서 어휘력은 세상을 보는 해상도라는 말이 있다. 나도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어휘력이 더 이상 늘지 않고 정체되어 버렸는데, 글쓰기 실력이 정체된 것도 그때부터인것 같다. 

  긴 글을 적을 줄 알아야 한다. 글의 의미보단 꾸밈새에 집중하고, 얄팍한 어휘력을 숨기려는 태도는 글을 짧게 적도록 만든다. 짧은 글에선 그런 것들이 티가 덜 나기 때문이다. 자신이 글 쓰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긴 글을 적기가 두렵고, 페이스북 타임라인이나 인스타그램 게시물에만 짤막하게 글을 남기는 데 집중하고 있다면, 스스로 진단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태도는 글 쓰기 실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자기를 과대평가하도록 만든다. 대표적인 예시로, SNS에 허구헌 날 등장하는, 공허하고 짧막한 문장들을 내뱉는 몇몇 자칭 작가들이 있다. 그들이 적는 글은 속은 비어있고 겉은 싸구려 시트지로 포장한 선물상자 같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하고 당연한 말들을, 근사하게(그마저도 성공적이지 않지만) 표현하는데 급급하다. 문장에 의미가 없으니, 다른 문장과의 관계가 무의미하고, 그래서 그들은 글을 길게 적지 못한다. 

  내가 사랑하는 조지 오웰은 1946년(<1984>를 탈고하기 2년 전)에 쓴 그의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인간이 글을 쓰는 네 가지 동기에 관해 설명했다. 첫째는 온전한 이기심으로, 똑똑해 보이고 싶거나 관심을 받고자 글을 쓰는 것이다. 둘째는 미학적 열정, 셋째는 역사적 충동, 그리고 넷째는 다름 아닌 정치적 목적이다. 정치적 목적이란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나와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망을 말한다. 그는 정치적이지 않은 글은 없다고 했다. 정확하게는, 정치적 목적으로 쓰인 글 만이 생명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말을 한다.

... 훌륭한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내게는 네 가지 동기 중, 어느 것이 더 강력한 동기인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느 동기가 가장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안다. 내가 쓴 작품들을 돌이켜봤을 때, 생명력이 부족하고, 화려한 묘사에만 집착하고, 의미 없는 문장만 나열하거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실없는 소리만 남발한 글에는, 언제나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었다.

2021년 8월 19일 일기 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