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젊은 과학의 전선: 테크노사이언스와 행위자-연결망의 구축」을 읽고
서론
“좋은 연구자란 무엇이고, 그렇게 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하나요?”
새로 뵙는 교수님과 대화를 나눌 때 나는 종종 이 질문을 드린다. 질문을 받은 교수님들은 하나같이 곰곰히 고민한 뒤, 좋은 연구자에 대한 각각의 정의를 내린다. 양자광학을 연구하는 어느 교수님의 답변이 인상 깊게 남았다. “좋은 연구자는 학계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연구 주제를 찾아내는 선구안을 지니고 있다”는 답변은 뒤에서 살펴볼 연구의 본질에 대한 논의와 궤를 같이한다. 좋은 (과학) 연구자가 되는 법을 묻기 전에, 우선 과학이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과학적 지식은 현대 인류가 가장 신뢰하는 지식으로, 사람들은 무언가가 “과학적이다”라는 표현에 상당한 신용을 부여한다. 과학적 방법론을 따라 진행된 연구의 결론은 다른 어떤 지식보다도 합리적이며, 과학자의 연구활동의 결론인 논문은 인간을 제외하고도 논의할 수 있는 진리의 영역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과학이 사회의 진보를 이끈다고 믿으며, 새로운 과학기술은 “과학자들에 의해서” 발명되거나 발견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인식은 과학자에 대한 경외심과 함께 과학지식의 신비주의를 더욱 강화한다.
그러나 과학자 역시 연구실 밖에서는 사회를 구성하는 한 명의 개인으로서, 일반인들과 똑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대학이나 기업 연구소에 소속되어 정해진 월급을 받고 가족을 부양하는 삶은 과학자나 일반 직장인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과학자들과 그들의 연구활동에 유달리 큰 합리성을 부여하는가? 과학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프랑스의 과학기술학자 브뤼노 라투르는 “과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탐구하기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의 Salk institute for biological studies의 실험실에서 2년간 과학자의 삶을 관찰했다. 과학자와 연구활동의 인류학적 접근을 통해, 그는 과학은 단순히 절대적인 진리를 인간이 발견하는 것이 아니며, 과학자를 포함한 행위자의 연결망이 상호작용을 하며 만들어내는 상대적인 지식체계, 테크노사이언스라는 결론을 내린다. 「젊은 과학의 전선(Science in action)」은 “만들어지는 과학”에 대한 라투르의 분석이 담긴 책이다.
본 글에서는 이 책에 담긴 라투르의 주장을 정리한 뒤, 여기서 파생되는 몇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시도를 해보고자 한다. 라투르의 주장에 대해 우리는 “테크노사이언스는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또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음 질문인 “좋은 과학 연구란 무엇이며, 성공적인 연구자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역량이 무엇인가?”에 도달할 것이다.
본론
과학적 논쟁. 실재론자와 상대론자
라투르는 과학에 모순되는 야누스의 두 얼굴이 있다고 말한다. 과학적 지식에 대한 사람들의 상반된 인식을 야누스의 두 얼굴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라투르는 야누스의 네 번째 격언으로써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어떤 것이 참일 때 그것이 유지된다”와 “어떤 것이 유지될 때, 그것은 참이 된다” 중 어느 편이 맞을까? 이 질문을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하면, 어떤 이론이 진리에 가까울 때 그것이 정론이 될까 아니면 어떤 이론이 정론이 되면 그것이 진리가 될까?
많은 과학자, 특히 환원주의적 접근을 자주 하는 많은 물리학자는 과학적 지식은 누적되며, 진리를 향해 가까워진다고, 적어도 그렇게 하기 위해 과학자가 노력한다고 이야기한다. 역사적으로도 플라톤의 기하학에 대한 집착은 이데아라는 완벽한 세상에 대한 탐구였다. 교회의 지원을 받아 연구하던 중세 많은 과학자 또한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본질을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한 탐구였다. 이렇듯, 과학적 주장 중 자연 본질과 더욱 가까운 이론이 살아남고 받아들여진다는 인식을 라투르는 실재론자(realists)라고 부른다. 실재론자에게 자연은 심판관으로서, 자연은 여러 과학적 주장 중 틀린 것은 가려내고 가장 옳은 것을 선택한다. 실재론자가 과학적 논쟁을 연구할 때는 자연 말고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라투르는 실재론자의 과학에 대한 인식은 지나치게 좁은 영역에서 과학을 이해하는 것이며 많은 사회적 맥락을 놓치게 된다고 비판한다. 그는 어떤 과학적 주장이 모종의 이유로 더 많은 지지를 받게되어 정론이 되면, 그것이 진리라고 받아들여진다고 주장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실재론자들이 이야기하는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우리는 알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이와 같은 입장을 라투르는 상대론자(relativists)라고 부른다. 상대론자에게 자연은 “(논쟁의 승자가 결정될) 선언을 기다리는 동안 동맹자를 모집”한다.
상대론자가 과학적 논쟁을 연구할 때는, 과학자들의 세력 싸움에 수반된 모든 요소를 연구해야 한다. 실험 도구, 과학자 집단, 정부의 과학정책 등 과학적 논쟁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모든 요소를 행위소(actant)라고 부른다. 특히 라투르는 과학자들이 논문을 통해 과학적 주장을 개진하고 반대론자와 논쟁하는 과정에서, 논문에 쓰이는 수사학적(rhetorical) 기술을 분석했다. 이 중에서도 “참고문헌 달기”는 가장 많이 쓰이는 “내 편 늘리기” 방식이다.
수사학: 인용(Citation)은 내 편 늘리기의 수단이다.
과학 글쓰기 강의에서 정확하고 풍부한 참고문헌의 인용은 매우 중요하다고 교육된다. 그런데 이런 참고문헌의 인용이 왜 중요한 것일까? 좋은 참고문헌을 많이 인용할수록 나의 글은 더욱 신빙성을 갖추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참고문헌이란, 좋은 저널에 게재된 논문이나 유명한 출판사의 책을 말한다. 좋은 저널은 일반적으로 편집자의 꼼꼼한 검수를 받기 때문에 논문을 한 번 게재하기가 어렵다. 이 때문에 좋은 저널에 게재된 논문들은 덜 유명한 저널에 게재된 논문에 비해 더욱 많은 사람이 신뢰하고 인용도 많이 된다.
그러나 편집자의 검수와 게재 승인은 과연 객관적인가? 그렇지 않다. 편집자는 보통 해당 학술분야의 권위자인데, 편집자가 잘 아는 동료의 논문이나 같은 분야의 저명한 교수가 쓴 논문은 다른 논문에 비해 쉽고 빠르게 승인된다. 이러한 점은 많은 대학생들이 유명한 교수 밑에서 논문을 작성하길 바라는 이유 중 하나이다. 어떤 저널의 게재 승인 기준이 주관적이라면, 그 저널에 게재된 논문을 우리가 쉽게 신뢰하는 태도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그렇다면 가장 첫 질문으로 돌아와서, 우리가 좋은 참고문헌을 많이 인용할수록 우리의 글이 객관적으로 신빙성 있는 글이 되는지 의문이 생긴다. 우리가 참고문헌을 많이 인용하는 것은 우리 글의 객관성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류 학계의 의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을 내세움으로써 우리 글의 주관적인 신빙성을 높이는 일이라는 것이 라투르의 분석이다.
라투르는 인용은 단순히 참고 문헌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장을 강화하고 지지자들을 확보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과학적 주장에 대한 반대자의 입장에서 인용을 하지 않은 글에 반박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인용을 한 글에 반박을 한다면 상대해야 하는 적의 수가 늘어난다. 만약 유명 저널에 게재한 논문을 인용한 글에 반대를 한다면, 그 반대자가 상대해야 할 적은 인용 논문의 저자와 저널 편집자 그리고 인용 논문을 인용한 다른 학자 등 수많은 학자다. 반대자는 자신이 상대해야 하는 거대한 세력에 부담을 느끼기 마련이다.
물론 인용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목적의 인용이 있고, 반대로 어떤 과학적 주장에 반대하는 맥락의 인용이 있다. 라투르는 전자의 경우를 인용의 긍정적 양태(positive modalities)로, 후자를 인용의 부정적 양태(negative modalities)로 정의한다. 어떤 논문은 다른 논문을 긍정적 양태로 인용함으로써 세력을 늘릴 뿐만 아니라, 나중에 출판되는 문헌에 의해서 다시 인용되면서 권위를 갖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과학 논문의 피인용 지수(Citation Index)로 수치화되어 저널 또는 과학자의 학술적 권위를 정량적으로 평가한다. 권위 있는 연구자는 많이 인용되는 연구자이고, 많이 인용되는 연구자는 자기 편이 많고 지지받는 연구자이다. 이러한 지지는 과학적 진리와는 무관하고 철저히 사회적인 현상이다.
과학 논쟁: 저자는 과학적 주장의 대변자(spokesman)
저널이나 저자의 유명도 말고도 과학적 주장에 신빙성을 더하는 요소가 있다. 실험 데이터다. 투명하게 공개된 데이터에 기반한 과학적 주장을 많은 사람들은 쉽게 “사실”의 지위를 부여한다. 그러나 학계의 과학적 논쟁들은 실험 데이터에 기반하여 이루어진다. 어떤 주장이 데이터에 기반한다고 그것이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실험 데이터에 기반한 과학적 주장을 반대하는 연구자들은 어떤 전략을 취하는가?
라투르는 과학적 주장을 하는 과학자는 “도구의 창에 기입된 내용의 대변인(spokesman)”처럼 행동한다고 말했다. 과학자와 데이터는 “대변인-유권자”의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반대자는 대변인과 유권자 연결의 약한 고리를 시험한다. 반대자는 과학자의 주장과 데이터를 분리하고자 한다. 이 시도가 성공하면, “대변인은 그 자신을 변호하는 주관적 개인이 된다.” 그러나 이 시도가 실패하면 “대변인은 여전히 누군가를 대표하는 객관적 대표자로 남는다.”
라투르는 반대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대항 실험실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더 많은 세력을 모으기 위해서, 반대자는 더 좋은 실험실을 가져야 한다. 더 좋은 실험실의 조건은 더 많은 블랙박스(black box)를 갖는 것이다. 블랙박스란, 컴퓨터 계산과 같이 출력 결과를 우리가 의심하지 않는 실험 장치나, 패러다임과 같이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는 지식체계를 통칭한다. 라투르는 과학은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Science in action)과 블랙박스화 된 과학(black-boxed science)으로 구분된다고 말했다.
더 정밀한 실험 도구를 많이 가진 실험실, 즉 더 많은 블랙박스를 갖고 있는 실험실에서 발표한 실험결과는 힘이 강하다. 또한 논박하기 어려운 새로운 분석 도구를 사용한 주장은 다른 반대자들이 따져 묻기 어렵다. 이러한 블랙박스를 많이 사용할수록 과학적 주장의 힘이 강해진다.
더 많은 블랙박스를 동원하는 방식 말고도 반대자들에게는 여러 전략이 존재한다. “행위자로 하여금 대변인을 배반하게 하기” 나, “새로운 동맹의 형체 짓기”의 방식으로 다른 주장의 힘을 약화하고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어떤 과학자들은 자연에 호소하기도 한다. 자연을 심판관으로 여기는 실재론자들의 경우인데, 라투르는 이러한 전략은 어느 한 편에 승세를 제공하기에 충분치 않다고 말한다. 라투르에 따르면 “논쟁이 일단 해결되면, 그렇게 한 것이 최종 동맹자인 자연”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여, “논쟁의 해결은 자연 재현의 원인이지, 결과가 아니다.”
과학에서의 이해관계
이해관계의 번역(translation)
많은 과학자들은 정권마다 유행하는 과학 토픽이 있고, 이것이 5년 단위로 바뀌는 것이 피곤하다며 토로한다. 이러한 현상은 과학 연구가 정부 정책에 상당히 의존하기 때문이다. 과학 연구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고, 어떤 분야의 흥망성쇠는 정부와 기업의 관심이 어디에 있고, 얼마나 많은 재원을 투자하냐에 따라 결정된다.
과학에서 후원자의 중요성은 고대 그리스 과학에서부터 현대까지 관찰된다. 고대 그리스의 멸망 이후, 로마와 이슬람 제국의 통치 세력의 과학에 대한 관심도에 비례해서 그리스 지식이 보존되고 수용되었다. 중세에는 기독교의 입맛에 맞는 법학, 신학, 의학이 크게 연구되었고, 16세기 과학혁명 시기엔 메디치 가문의 후원이 주요했다. 20세기 과학혁명 이후로는 과학기술이 국가와 기업의 패권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과 함께 정부와 기업 중심의 과학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라투르는 여러 행위자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협력하는 행위를 번역(translation)이라고 부른다. 과학자는 학술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정치가들은 정치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협력한다. 고대 그리스의 히에론 2세는 정치 권력의 안정을 위해 아르키메데스에게 군사기술 연구를 맡겼다. 아르키메데스는 왕의 후원을 받아 과학 연구를 진행했다. 현대의 과학자 역시, 정부나 기업의 연구 과제 용역을 수행한다. 정부와 기업은 자선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므로, 과학자들은 정부와 기업의 목표를 이해하여 자신의 연구가 왜 그들의 목표를 이루는데 중요한지 설득한다.
내부자의 외부활동, 이해관계 부여
이러한 과학자들의 행위를 라투르는 이해관계 부여(translating interests)라고 명명했다. 과학 연구는 과학자와 정부, 기업, 엔지니어 등 수많은 행위자가 참여하는 연결망이다. 어떤 학문 분야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행위자들에게 이해관계를 부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해관계 부여는 결국 과학자 본인이 해야하며, 이런 활동을 라투르는 내부자의 외부활동(Insiders out)이라고 불렀다. 라투르는 지질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없던 시절 지구의 역사를 연구한 영국의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의 사례를 들어 내부자의 외부활동이 연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했다.
찰스 라이엘은 지질학이 없던 1820년대,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이었다. 그는 지구의 역사를 연구하고 싶었지만, 당시엔 광물을 수집하는 아마추어 동호인밖에 없었다. 지질학자라는 이름은 나중에야 붙여진 칭호이고, 당시엔 지구의 역사를 연구하며 안정된 수입을 얻는 직업이 없었다. 찰스는 지질학의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만들어야 했다.
찰스는 당시 계몽된 상류 계급에 지질 강의를 하고자 했다. 강의를 위해선 지질학 지식을 비전문가도 이해할 만큼 쉽게 전달해야 하지만, 아마추어와는 구분되기 위해서 강의에 시간을 할애하면서도 지질학 연구를 병행해야 했다. 상류 계급의 관심이 꺼질 것을 대비해 정부 관료의 관심을 끌어야 했고, 석탄 매장물을 발견하고 땅과 영토를 측량하는 문제를 지질학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마케팅을 통해 이해관계를 결집했다. 찰스 라이엘은 지질학 연구만큼이나 지질학의 각 행위자에게 이해관계를 부여하는데 노력했다.
누가 과학을 하는가? 연결망 전체가 과학을 만들어 낸다
찰스 라이엘이 이해관계를 부여하는데 실패했다면, 그가 연구한 지질학 지식마저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내부자의 외부활동은 과학적 지식의 형성에 중요하다. 과학은 단순히 과학자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거대한 연결망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라투르는 “과학”이라는 용어를 대체하는 “테크노사이언스(technoscience)”라는 새로운 단어를 정의했다. 과학자를 포함한 사회 전체가 연결되어 만들어 나가는 과학이라는 의미이다.
라투르는 “우리는 거대한 싸이클로트론을 보면 그것이 누구의 직접적 이해관계와도 멀리 떨어진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상은 수백 명의 사람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어떤 분야가 이해관계가 많이 결집하여 있을수록, 역설적으로 이해관계로부터 독립된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어떤 전자공학자의 연구가 단순히 삼성전자의 이해관계만 얽혀있다면, 그는 삼성전자가 필요로 하는 특정 기술에 대한 연구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연구가 여러 기업과 정부의 이해관계에 얽혀있다면, 그는 그의 기존 관심분야에 더욱 가까운 연구주제를 선택하고, 더 돈이 많이드는 대형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 좋은 연구자가 갖추어야 하는 역량
우리는 과학적 논쟁이 수사학이 동원되는 세력다툼이라는 사실과, 이해관계의 구축이 학문 분야의 성립에 핵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라투르는 테크노사이언스의 해부학적 구조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테크노사이언스는 외부에서의 이해관계 모집(Sociogram)과 내부에서의 동맹자 모집(technogram)으로 이루어지며, 테크노사이언스의 내부와 외부 구분은 이러한 구조에 따른 잠정적 결과라고 설명한다. 내부와 외부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으며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
과학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좋은 연구자의 정의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과학은 오직 과학자에 의해서만 이뤄지는 “진리 찾기 놀이”라는 기존의 인식 아래에서는, 좋은 연구자란 실재(real)를 잘 인지하는 명석함과 창의력을 지닌 사람이 좋은 연구자일 것이다.
그러나 라투르가 설명한 테크노사이언스의 연결망에 속해있는 한 명의 구성원으로서의 과학자는 갖춰야 할 역량이 훨씬 많은 듯하다. 먼저 내부에서의 동맹자 모집 측면에서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학계에서 자신의 편을 많이 만들고 다른 연구자들이 자신의 연구를 많이 인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업적 역량을 기를 뿐만 아니라, 학계 주류인사와의 학술 교류를 늘려야 한다. 대학생인 필자에게 적용하자면 대학원 진학 결정을 할 때, 학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교수의 연구실로 진학하는 것이다. 유명한 연구그룹에 속해 연구하는 것은 학업적 역량을 기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노력과 성취가 더 많은 관심과 마땅한 대우를 받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다음으로 외부에서의 이해관계의 모집(Sociogram)의 측면에서, 자신의 분야를 외부에 더욱 알리고 이해관계를 구축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 정부와 기업의 이해관계를 이해하는 능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이해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흔히 과학자는 실험실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므로 가장 사회적이지 않은 직업이라고 생각하지만, 라투르에 따르면 과학자는 외부활동을 적극적으로 해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의 여러 인사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회능력이 중요해진다. 정부 과학기술정책 관료나 기업 임원과의 접촉을 늘리고, 이들의 이해관계와 나의 이해관계를 정렬(align)하는 것은 중요하다. 지질학의 외부를 만들기 위해 상류층 귀족과 정부관료를 가까이 둔 찰스 라이엘의 사례에서 이러한 점을 배울 수 있다.
사실 이러한 역량이 중요하다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학계의 주류가 되는 것이 중요하고, 사회성있는 성격과 인맥 유지 능력이 누구에게나 중요하다는 것은 일반적 상식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기 전과 후의 차이라면, 이전까지는 이러한 요소의 중요성이 “과학 밖의 것”이고, “현실을 살아가기에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면, 이제는 “이것 자체가 과학의 본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물리학 박사를 하고자하는 필자는, 좋은 대학원에 진학해야 하는 것을 학벌주의로 치부하지 않게 되었고, 사회생활의 중요성을 현실사회의 피곤함으로 치부하지 않게 되었다. 물리학 연구를 하면서 안정된 삶은 꿈꾼다면, 가만히 앉아 순수학문의 중요성을 모르는 정치인들을 향해 혀를 찰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물리학을 판매하는 영업 사원이 되어야 한다. 과학은 사회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고, 과학자는 고고한 신선이 아니라는 것. 이 책으로부터 얻은 깨달음이다.
참고문헌
브뤼노 라투르. 『젊은 과학의 전선: 테크노사이언스와 행위자-연결망의 구축』. 황희숙 옮김, 아카넷,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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